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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막내, 파산 전날로 돌아가 가족부터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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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핸들 위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떨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지난 세 시간을 돌이켜보려 했지만, 뇌는 오직 한 가지 신호만 반복했다: *도망쳐. 더 멀리.* 서울 외곽 고속도로. 밤 11시 47분. 차선 변경 금지 구간에서 검은색 BMW가 정확히 시속 120킬로미터로 질주하고 있었다. 운전석의 남자는 서른 살도 되지 않아 보였지만, 눈빛만은 예순 살 노인처럼 지쳐 있었다. "아버지 말이야. 내일 아침 파산 신청한다고." 휴대폰의 음성 메시지. 형 이재훈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재벌가 장남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였다. "준호, 전화 받아. 제발." 두 번째 메시지. 역시 이재훈. "형아. 어쨌든 너는 집에만 있으면 될 거 아니야. 어차피 넷 중에 누군가는..." 세 번째. 이수진. 둘째 형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준호는 휴대폰을 집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회의에서 아버지가 할 말을.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질 것을. 그리고 그 이후로 모든 것이 어떻게 무너질 것인지를. 10년 전의 기억. 아니, 10년 전이 아니다. 정확히는 10년 뒤의 기억이다. 준호는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고속도로의 조명이 차창을 스쳐지나간다. 노란 줄무늬. 흰 글씨. 제한 속도 100킬로미터. 그는 속도를 높였다. 왜? 차를 더 빨리 몰면, 집에 더 빨리 도착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까?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중얼거림.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지난 몇 시간은 환각이었을 거다. 깨어나면 평범한 목요일 아침이 되어 있을 거다. 회사 회의실 테이블 위의 커피 냄새. 아버지의 목소리. 임원진들의 마스크처럼 경직된 얼굴들. "파산신청을 진행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누군가가 물었다. 준호는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들은 모두 같았다. "우리 가족은?" 이민지가 물었다. 막내. 그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울고 있었다. "회장님, 자산 동결이..." "충분히 알고 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끊겼다. 정말로, 물리적으로 끊겼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준호는 고속도로에서 벗어났다. 지방도로로 진입하며 속도를 조절했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와이퍼가 최고 속도로 움직였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미니스트롱 경고음. 어머니였다. "준호야, 어디 있어?"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숙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서미라 이사는 눈물을 잘 흘렸다. 항상 약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조금만 기다려. 집에 가면 다 해결된다." 거짓말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준호는 차 속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운전했다. 빗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였다. 마치 지난 10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압축되어 재생되는 것 같았다. "형들은?" "모두... 여기 있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끊겼다. 아마도 핸드폰을 누군가 빼앗은 것 같았다. "준호." 아버지였다.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지는 건물의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들어가세요. 저를 기다려주세요." 준호는 핸들을 꺾었다. 좌회전 신호. 지방도로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 "기다릴 시간이 없다." 아버지의 말은 이상했다. 그것은 현재형이 아니었다. 과거형이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들어가. 어머니를 돌봐." 통화가 끝났다. 준호의 양발이 페달을 누르기 시작했다. 더 깊이. 더 강하게. 시속 140킬로미터. 시속 160킬로미터. 빗소리가 바뀌었다. 더 이상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천장을 헐어내고 물을 쏟아붓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순간이었다. 트럭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준호의 차가 트럭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방향이 틀어진 것이 아니라, 차 자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방향 감각을 잃은 몸이 회전목마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 소리가 나왔다. 준호 자신의 목소리인지, 엔진의 비명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창문이 깨졌다. 빗소리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창문 밖의 일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팔이 대시보드에 부딪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명확한 소리였다. "아..." 다시 소리가 나왔다. 이번엔 확실히 자신의 목소리였다. 차는 여전히 회전 중이었다. 바깥이 보였다. 안이 보였다. 다시 바깥이 보였다. 다시 안이 보였다. 그 회전 중에, 준호는 뭔가를 봤다. 차 밖의 가로등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그들은 차 사고를 보고 있었다. 아니,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었다. 가장 왼쪽에, 가장 큰 키의 남자. 이재훈. 그의 입은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옆에, 검은 머리의 남자. 이수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준호가 예상한 것과 정확히 같았다. 약간의 놀라움과 깊은 무관심. 그 옆에, 더 작은 키의 여자. 이민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마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 회색 머리의 여자. 어머니. 서미라. 그녀는 이민지를 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창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 옆에... 아버지가 없었다. 이강호는 거기 없었다. 그래서 준호는 알았다. 아버지는 이미 가버렸다는 것을. 다시 회전했다. 가로등이 사라졌다. 하늘이 보였다. 빗소리가 폭우로 변했다. 준호의 눈은 천장을 통해 하늘을 봤다. 검은 하늘. 회색 구름. 그 사이로 번쩍이는 번개. "아버지..." 중얼거림. 그의 손가락이 핸들에서 떨어졌다. 차는 더 이상 회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췄다. 소리도 멈췄다. 빗소리도 멈췄다. 오직 심장의 고동만 남았다. 규칙적이지 않은, 마치 깨진 메트로놈처럼. 그것도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멈췄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천장이었다. 희색 천장. 익숙한 천장. 그의 침실 천장. 준호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러다 갑자기 공기가 폐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숨. 마치 처음 산소를 마시는 신생아처럼. "......"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오른손. 왼손. 다리. 발가락. 모두 움직였다. 정상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너무 빠르게.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갈 것 같았다. 준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시트가 등에서 떨어졌다.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 전체가 땀에 젖어 있었다. "뭐......" 목소리가 나왔다. 낮고 쉰 목소리. 며칠을 말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 그는 침실의 벽을 바라봤다. 회색 벽. 그 위의 액자들. 그의 대학 졸업 사진. 형들과 함께한 가족 사진. 여동생 민지의 전시 포스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침실의 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밤이었다. 조용한 밤. 빗소리는 없었다. 준호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나무 바닥. 현실의 감촉. 거울. 침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 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었다. 25세의 얼굴. 길쭉한 얼굴. 검은 눈. 어두운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는 공포가 있었다. "....10년."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입이 움직였다. "정확히 10년이었다." 침대로 돌아갔다. 침대 옆 탁자 위의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이 켜졌다. 날짜: 2024년 3월 15일 금요일, 밤 11시 47분. 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그 날짜를 안다. 너무 잘 안다. 그의 몸과 영혼에 박혀 있는 날짜다. 2024년 3월 15일. 내일이 2024년 3월 16일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파산을 발표하는 날. 차가 고속도로에서 트럭과 충돌하는 날. 아버지가 죽는 날. 준호는 휴대폰을 놨다. 손이 떨렸다. "말도 안 돼." 침대에 앉았다. 침대가 그의 체중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현실의 무게. 현실의 감촉. 그는 10년을 살았다. 10년을 정확하게. 회사의 파산. 아버지의 죽음. 형들의 흩어짐. 어머니의 눈물. 여동생 민지가 집을 떠나간 모습. 모든 것을.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 여기 있다. 침실에. 3월 15일 밤 11시 47분에. 다시. 처음부터. 준호는 천천히 다시 일어섰다. 이번엔 더 천천히. 마치 이것이 꿈이고, 움직임이 깨울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옷장으로 걸어갔다. 여름 옷들. 정장. 캐주얼.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자신이 입던 옷들. 자신이 선택한 옷들. 그는 옷장의 왼쪽 위를 봤다. 거기엔 작은 상자가 있었다. 신발 상자 크기의 상자. 그는 그 상자를 내려놨다. 상자 속에는 문서들이 있었다. 회사 자료. 재무제표. 계약서. 모두 자신이 이 10년간 수집한 것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수집한 것들. 아니, 과거의 기억 속에서 수집한 것들. 시간이 꼬였다. 준호는 상자를 침대 위에 놨다. 문서들을 천천히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박은영의 거래 기록. 2024년 3월부터 시작해서 10년간 이 자료들이 회사를 어떻게 좀먹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 아니, 알았다. 이미 봤다. 이미 살았다. 이준석의 서명. 회사 자금을 해외로 송금하는 거래 승인서. 그의 삼촌의 서명. 그 거래가 회사 붕괴의 시작이었다. 준호는 천천히 문서들을 정렬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지만, 마음은 점점 차가워졌다. 10년을 다시 살 기회. 한 번의 기회. 침대 옆 탁자 위의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 화면은 여전히 11시 4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니, 11시 53분이 되어 있었다. 카톡 알림이 하나 있었다. 발신자: 아버지 (이강호) 메시지: 긴급. 내일 오전 8시. 회의실. 모두 참석할 것.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10년 전, 그 차가 회전할 때의 목소리. 마지막 순간의 목소리. "아버지..." 중얼거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차가워진 목소리.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희색 천장. 똑같은 천장. 그의 눈은 천장을 뚫고 미래를 봤다. 아니, 과거를 봤다. 10년을 살고 돌아온 그 과거를. 내일, 아버지는 파산을 발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박은영의 횡령이 드러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준석의 배신이 드러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수진의 야심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차가 고속도로에서 회전할 것이다. 아버지는 죽을 것이다. 형들은 흩어질 것이다. 어머니는 혼자 남겨질 것이다. 민지는 집을 나갈 것이다. 준호는 그 모든 것을 다시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 10년을 살고 온 경험. 그것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다. 침실의 불을 껐다. 어둠이 내려왔다. 침대 위에서, 준호는 내일의 계획을 생각했다. 첫 번째: 아버지가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직접 찾아간다. 두 번째: 박은영의 거래 기록을 보여준다. 세 번째: 이준석의 배신을 밝힌다. 네 번째: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멈춘다. 다섯 번째: 아버지를 살린다. 다섯 번째가 가장 중요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심장은 정상 속도로 뛰고 있었다. 마치 10년을 깨어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악몽을 꾼 것뿐인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악몽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창 밖의 서울은 여전히 밤이었다. 차갑고 조용한 밤. 내일 아침이 오기까지, 8시간이 남아 있었다. 8시간의 시간.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한 8시간. 준호는 눈을 감은 채로, 천장을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 검은 천장. 검은 하늘. 그 사이로 번쩍이는 번개처럼 미래가 반짝였다. 그는 이번엔 다를 것이다. 이번엔 아버지를 지킬 것이다. 이번엔 가족을 지킬 것이다. 이번엔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침실의 시계가 자정을 향해 움직였다. 2024년 3월 16일까지, 이제 8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