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년 무명 헌터, 망해가는 길드를 인수하다# 회귀 전 파국
던전의 벽은 검은색이었다.
아니, 검은색이 아니라 피로 물든 것이었다. 준호는 손가락을로 벽을 스쳤다. 끈기 있는 액체가 손끝에 묻었다. 자신의 피인지, 팀원의 피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인원?"
음성 통신기를 켰다. 잡음만 돌아왔다.
다시 시도했다.
"박서연, 들려?"
침묵.
통신기를 손에서 놨다. 딱 떨어지는 소리가 돌담 위에서 울렸다. 준호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그것도 멈췄다. 웃을 에너지도 남지 않았다.
던전 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느리고, 자신감 있는 발걸음.
준호는 뒤를 돌아봤다.
이강호였다.
S급 헌터. 천정 길드 최강자. 회귀 전 10년 뒤의 시간에서 준호가 마주쳤던 마지막 상대였다. 아니, 상대라는 말도 거창했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이강호는 다르게 보였다. 더 젊었다. 더 신선했다.
"준호."
이강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 침착함이 가장 무서웠다.
"당신이 신월 길드장이군요."
준호는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다. 왼쪽 팔이 이미 쓸모없었다. 던전 보스와의 교전에서 골절됐고, 그 다음 이강호와의 싸움에서 더 부러졌다. 팔을 움직이려 해도 신경이 반응하지 않았다.
"협회에서 당신들의 상승률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이강호는 천천히 걸어왔다.
"3개월 만에 F등급에서 A등급까지. 이건 통상적이지 않습니다."
준호는 후퇴했다. 뒤에 벽이 있을 때까지. 그의 손가락이 벽의 거친 질감을 느꼈다. 피와 먼지와 석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뭘 원하지?"
"원하는 게 많죠."
이강호가 멈췄다. 준호와 5미터 거리. 던전의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하나는, 당신이 어떻게 이것을 해냈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더 잘했을 뿐이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은 10년을 무명 헌터로 살다가 갑자기 나타났어요. 아무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천정 길드를 위협하는 수준의 포인트를 모았어요.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준호는 침을 삼켰다. 입이 말랐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요."
이강호의 한 발짝이 준호를 향했다.
"당신은 미래에서 왔다."
시간이 멈췄다.
준호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뛰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이강호가 알았다. 이강호가 정말로 알았다는 뜻이었다.
"회귀자."
이강호가 또 한 발짝 나아갔다.
"당신은 회귀자야."
"증명해 봐."
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간단해요."
이강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순수했다. 정말로 즐거운 웃음이었다.
"당신도 나를 알고 있거든요. 내 전술을, 내 능력을, 내 약점까지. 당신은 나와 싸워본 적 있어요. 아마 여러 번."
"그럼 뭐?"
"그럼 나도 알아야지요."
이강호의 몸이 움직였다.
그것은 공격이 아니었다. 검사였다. 준호를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 이강호의 눈에 감정이 사라졌다. 대신 차가운 분석력이 깃들었다.
"3개월 뒤에 당신은 여기서 죽을 거예요."
"뭐가—"
"천정 길드는 당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어요. 당신이 시스템을 악용한다는 협회의 신고를 받았거든요. 우리는 당신을 없애고, 협회는 만족하고, 나는 당신이 어떻게 미래 지식을 사용했는지 파악한다. 완벽한 거래지요."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데 여기 있다는 건 당신이 예상했다는 뜻이다."
"네."
"그래도 왔다?"
"갈 곳이 없었어요."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강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의 길드는 이미 끝났습니다. 박서연은 30분 전에 죽었어요. C등급 의뢰인데도 불구하고 보스 몬스터 2체가 나왔거든요. 협회가 던전 정보를 조작한 거예요. 한지은도 죽었고, 김태현도. 신월 길드는 이제 당신 하나만 남았어요."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짓말이야."
"확인해 보세요."
이강호가 통신기를 내밀었다.
준호는 자신의 통신기를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통신 목록을 열었다. 박서연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2시간 전이었다.
—준호, 의뢰 완료했어. 귀환 중.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준호는 다른 대원들을 불렀다. 한지은. 김태현. 이준석. 박민수. 새로 들어온 신입 셋.
모두 침묵이었다.
"당신은 이미 졌어요."
이강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귀자라는 게 당신의 유일한 강점이었는데, 우리도 이제 알았거든요. 미래 지식도 완벽하지 않고, 당신의 몸도 약해요. 왼팔은 쓸 수 없고, 기력도 남지 않았다. 당신은 S급 헌터와 싸울 수 없습니다."
준호가 몸을 날렸다.
왼손을 들었다. 통증이 폭발했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강호를 향해 몸 전체를 날렸다.
이강호는 한 발짝 물러섰다.
준호는 떨어졌다. 돌 위로.
다시 일어났다. 다시 달렸다.
이강호는 손도 들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준호의 주먹이 날아오자 고개만 살짝 움직였다. 준호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당신은 3개월 뒤가 아니라 지금 죽을 거예요."
이강호가 말했다.
"미안해요, 준호."
그의 손이 움직였다.
준호는 그 손을 보지 못했다.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그의 배에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을 뿐이었다.
"아—"
"조용해요."
이강호의 다른 손이 준호의 목을 움켜잡았다. 들어올렸다. 준호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준호는 눈을 뜨려고 했다. 눈이 잘 안 떨어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당신의 회귀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요?"
이강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미래에서 온 자라는 건 과거의 자신을 바꿨다는 뜻이에요. 그럼 미래도 바뀔 거고. 그럼 당신이 본 미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거야. 당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게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준호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당신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어요."
이강호가 말했다.
"그냥 처음부터 다시 졌을 뿐이야."
준호의 의식이 떠내려갔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이강호의 눈이었다.
그 안에는 동정도, 분노도, 어떤 감정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확실성만 있었다.
---
검은색이 모든 것을 삼켰다.
눈이 떠졌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천장이었다.
낡은 천장. 벗겨진 페인트, 갈라진 석고. 준호는 누워서 그것을 바라봤다. 움직임이 없었다. 생각도 없었다. 그저 천장만 봤다.
분명히 이강호의 손이 있었다.
분명히 배가 관통당했다.
분명히 의식이 사라졌다.
그런데 천장이 있었다.
준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접었다. 통증이 없었다. 팔뚝에 흉터도 없었다. 배를 만져봤다. 옷은 낡았지만 온전했다.
그는 일어나 앉았다.
방은 작았다. 8평 남짓한 반지하 원룸. 창문 위로 보이는 것은 행인의 다리와 자동차 바퀴뿐이었다. 침대 옆 책상 위에는 라면 그릇이 쌓여 있었다. 냄새가 났다. 진득한 냄새.
준호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먼지를 그었다. 선명한 검은 선이 남았다.
"뭐야."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였다. 더 높았다. 더 약했다.
그는 거울을 찾았다. 작은 화장대가 구석에 있었다. 거울에는 젊은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 많은 주름이 있었던 얼굴. 더 깊은 눈썹이 있었던 얼굴. 이 얼굴은... 부드러웠다.
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침대 옆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있었다. 화면은 검었다. 켜봤다.
**2013년 11월 24일. 오전 6:47**
준호의 숨이 멈췄다.
2013년. 2013년이라니.
그는 침대에 앉았다. 다시 누웠다. 천장을 봤다. 이번에는 천장이 떨렸다.
10년.
10년 전으로 돌아왔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뜼 때마다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번 같은 천장이 보였다. 같은 냄새가 났다. 같은 침대가 있었다.
그는 일어나 앉았다. 이번에는 팔짱을 낀 채로.
기억을 정렬했다.
회귀 전 마지막 순간. 이강호가 말했던 것들. "당신이 본 미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았을 수도 있다. 준호가 지난 10년간 했던 모든 행동이 미래를 바꿨다면, 당연히 그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이건 뭐지?
준호는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날짜를 확인했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아침 6시 47분.
그는 먼저 인터넷을 켜려고 했다. 요금 미납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휴대폰의 다른 앱들을 열어봤다. 메모장, 계산기, 카메라. 기본 앱들만 있었다.
문자 메시지 함도 비어 있었다. 전화 기록도 없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대신 침대 위의 옷들을 뒤져봤다. 낡은 후드티, 구멍 난 청바지, 때가 묻은 양말.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동전과 담배 꽁초만 있었다.
그는 침대 아래를 봤다. 헌터 라이센스가 떨어져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준호**
**등급: F**
**발급일: 2012년 9월 15일**
**유효기간: 2013년 9월 15일 ~ 2014년 9월 15일**
라이센스 사진은 자신이었다. 더 어린 자신. 더 초라한 자신.
F등급. 회귀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등급이었다. 회귀 전 준호는 B등급 헌터였다. 10년 동안 천천히 올라왔던 등급이었다. 길드장으로서의 준호는 평가 등급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개인 헌터로서 도달했던 최고 등급은 B였다.
지금은 F였다.
준호는 라이센스를 바닥에 내려놨다.
생각했다. 이건 꿈일 수도 있다. 죽음 직전의 뇌가 만든 환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10년 전으로 돌아온 것일 수도 있다.
확인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준호는 짐을 챙겼다. 없을 게 없는 짐이었다. 낡은 후드티를 입고, 라이센스를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반지하 출입구를 통해 서울의 거리로 나왔다. 11월의 공기가 찼다. 과거의 공기였다.
준호는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10년 전 자신이 갔던 길이었다. 협회 헌터 센터. 서울 강남에 있는 협회 본부.
거기에 가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30분을 걸었다. 지하철은 타지 않았다. 돈이 없었으니까. 대신 걸었다. 강남 방향으로. 길을 헤매지 않았다. 10년 전의 지리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협회 본부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전 8시였다. 건물은 준호의 기억과 같았다. 27층 높이의 회색 건물. 로비에는 많은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준호는 접수대로 걸어갔다.
"라이센스 갱신입니다."
접수원이 라이센스를 확인했다.
"아, 2013년 이준호 님이시군요. F등급이시네요. 갱신 비용은 5만 원입니다."
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 원짜리 동전 몇 개가 나왔다. 부족했다. 훨씬 부족했다.
"현금이 없으신가요?"
"아, 잠깐만요."
준호는 카드를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카드가 없었다. 신용카드도, 체크카드도, 선불 카드도 없었다.
"죄송한데, 내일 다시 올 수 있으실까요?"
접수원은 친절하게 웃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센스를 돌려받았다.
그는 협회 건물을 나왔다.
확인됐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2013년 11월 24일, 오전 8시 30분. 준호는 정말로 10년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가진 게 거의 없는 상태로.
준호는 서울 거리 한복판에 섰다. 아침햇빛이 빌딩들 사이로 흘러내렸다. 10년 전의 햇빛이었다.
지난 10년간의 기억이 모두 떠올랐다. 무명 헌터였던 10년. 천천히 올라갔던 등급. 신월 길드 인수. 협회 시스템의 오류 발견. 한지은의 발굴. 최민준과의 경쟁. 이강호와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 던전 깊숙이에서의 죽음.
이강호가 말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당신이 본 미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준호는 그 말을 반복했다. 중얼거렸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니었다. 존재했다.
준호는 그 미래를 봤다.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협회의 음모. 신월 길드의 전멸. 박서연의 죽음. 이강호의 압도적 강함.
그리고 이번에는 다르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 원짜리 동전들. F급 라이센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는 10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협회 시스템의 구조를 알고 있었다. 길드 경영의 모든 함정을 알고 있었다. 최민준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준호는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북쪽. 강북. 신월 길드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혜진이 있는 곳이었다. 파산 직전의 길드장.
10년 전, 준호가 처음 길드를 인수받게 되는 장면. 그곳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전 9시였다. 아직 멀었다.
준호는 걸었다. 천천히, 확실히, 다시는 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