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계에 소환됐는데 던전을 통째로 물려받았습니다무릎을 꿇은 채로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외부 세계처럼 초침이 똑딱거리지 않았다. 루미의 초록빛이 맥박처럼 튀어오르며, 그 리듬에 맞춰 준호의 숨이 깊어졌다.
"일어나."
루미의 목소리였다. 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명령에 가까웠다.
준호는 천천히 손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아직 떨리고 있었다. 그림이 그의 발목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너는 이곳의 주인이다. 주인은 자신의 영역을 알아야 한다."
루미가 말하는 동안, 야광이끼의 빛이 조금씩 퍼져나갔다. 준호가 지금까지 본 것은 작은 방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빛이 멀어지자, 천장이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형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벽. 돌로 된 거대한 벽.
준호는 본능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발 밑의 돌은 매끄러웠다. 오래된 폐광산이라는 설명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곳은 너무나 정연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깎아낸 것 같은 정확함이 있었다.
"여기는?" 준호가 물었다. 목이 쉬어 있었다.
"중앙 광장이다. 모든 길이 이곳으로 모인다."
루미가 말하자, 초록빛이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준호는 비로소 자신이 거대한 원형 공간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벽을 따라 어둡게 패인 다섯 개의 구멍이 보였다. 동굴 입구들이었다.
"저쪽은?"
준호가 손가락으로 가장 큰 구멍을 가리켰다.
"석화가 사는 곳이다. 최심부. 던전의 심장에 가장 가깝다."
"심장?"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루미의 대답은 항상 이렇게 끝났다. 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천천히 광장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울렸다. 단단한 돌 위에서 부츠의 밑창이 내는 소리. 그 소리가 벽에 반사되어 자신을 따라다녔다.
"조심해. 넌 아직 이곳의 리듬을 모른다."
루미의 경고는 너무 늦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준호는 몸을 굳혔다. 그것은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렸다. 하지만 느릴수록 더 무서웠다. 느린 것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 깨어났구나."
돌 위에서 스르르 하는 소리. 준호는 뒤로 물러섰다. 그림이 그의 발 앞에 나타났다. 투명한 젤리 같은 몸이 초록빛에 반사되며 흔들렸다.
그림은 준호를 보고 있었다. 시각 기관이 없는데도, 그 방향이 명확했다. 준호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감정인지 호기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건?" 준호가 물었다.
"그림이다. 던전에서 가장 약한 몬스터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약함은 아니다."
루미가 설명하는 동안, 그림은 준호의 신발 끈에 기어올랐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동물이 낯선 냄새를 맡을 때처럼,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도?" 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루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중앙 광장의 왼쪽으로 빛이 이동했다.
그곳에는 물이 있었다.
작은 연못이 아니라 호수에 가까웠다. 물의 표면은 초록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준호는 가장자리까지 조심스레 걸어갔다. 물의 깊이를 재려고 돌을 던졌다.
물은 아주 깊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음식과 물이다. 필요할 때 마셔라. 독은 없다."
"어떻게?"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루미의 설명은 단순했다. 준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물가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물을 떠올렸다. 차갑고 투명했다. 냄새는 없었다. 입술에 닿은 순간, 신맛과 흙냄새가 혀 전체를 덮었다. 자연의 맛이었다.
준호는 여러 번 마셨다. 갈증이 깊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저쪽은?"
준호가 호수 반대편을 가리켰다. 거기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통로다. 그곳으로 나가면 외부 세계에 도달한다."
준호의 손이 멈췄다.
"가까워?"
"멀지 않다. 하지만 너는 아직 갈 수 없다. 너의 몸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루미의 초록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루미는 마치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없는데도.
"왜?"
"네 심장을 봐라."
준호는 손으로 가슴을 만졌다. 초록빛이 그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통과하면, 그 빛이 끊어진다. 그리고 넌 죽을 것이다. 루미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언제까지?"
"모른다. 시간은 너에게 달려 있다."
준호는 일어섰다. 호수 주변을 계속 걸어다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광장 쪽으로 돌아섰다.
그곳에서 그림은 여전히 중앙 광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위였다. 하지만 바위가 움직이고 있었다.
준호는 발걸음을 멈췄다. 바위는 천천히, 매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의 크기는 준호의 두 배 이상이었다. 표면은 거친 화강암이었고, 군데군데 이끼가 피어 있었다.
"이것이 석화다."
루미가 말했다.
석화의 몸이 완전히 일어섰다. 준호는 목을 들어 그것을 봐야 했다. 그것의 머리에는 두 개의 움푹 파인 구멍이 있었다. 눈이었을 것이다.
"안녕, 주인."
석화의 목소리는 준호가 예상했던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것이 준호를 진정한 주인이라고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너는?" 준호가 물었다.
"이곳의 수호자다. 주인이 약할 때 이곳을 지킨다."
석화의 대사는 불완전했다. 마치 오래된 인형극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딱딱했다.
그 순간, 준호는 깨달았다.
이곳이 정말로 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림이 준호의 발 위에 올라탔다.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마치 누군가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준호는 천천히 무릎을 구부렸다. 석화를 정면으로 마주봤다.
"나를 보여줘. 이곳을 전부."
석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움푹 파인 눈이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주인."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경멸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아주 작은 것이 있었다.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준호는 일어섰다. 그림은 계속 그의 발 위에 있었다. 루미의 초록빛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동쪽 통로였다.
준호는 따라갔다. 몸은 무거웠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하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다.
이곳이 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루미의 초록빛이 동쪽 통로를 밝혔다.
통로는 좁았다. 준호가 옆으로 몸을 날려야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벽은 습기로 반들거렸고, 어딘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적적적적. 그 리듬이 준호의 심장박동과 겹쳤다.
석화는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아마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곳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것들의 영역이다."
루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확히는 울렸다기보다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마치 공기 자체가 목소리가 되는 것처럼.
"가장 먼저 만날 것은 그림이다."
준호는 물었다. "그림?"
"물의 아이."
통로는 갑자기 넓어졌다. 준호의 눈이 적응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루미의 초록빛이 더 강해졌고, 그 빛이 닿는 곳에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아니, 호수라기보다는 웅덩이였다.
물은 검은색이었다. 아니, 검은색이 아니라 빛을 흡수하는 색이었다. 루미의 초록빛도 그 표면에 닿으면 둔해졌다. 마치 검은 천 위에 빛을 비추는 것처럼.
준호는 조심스럽게 물가로 다가갔다. 신발이 젖은 모래에 빠졌다. 차갑고 축축했다.
물 표면에 준호의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물 아래에서 준호의 상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그 왜곡된 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이 자신의 상이 아니라는 것을.
물이 움직였다.
물 표면이 출렁였다. 잔물결이 아니라, 뭔가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움직임이었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두려워 말아라."
루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하는 목소리였다. 준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물에서 뭔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거품처럼 보였다. 작은 거품들이 모여서 더 큰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모양을 드러냈다.
투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반투명했다. 물의 일부가 의식을 가지고 분리되어 나온 것처럼 보였다. 크기는 고양이 정도였다. 아니, 고양이보다 작았다. 새끼 고양이 정도의 크기였다.
"이것이 그림이다."
루미가 말했다. "가장 어린 것이고, 가장 약한 것이다."
그림은 물에서 완전히 떠올랐다. 물은 그것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치 기름과 물이 분리되듯이. 그것의 몸은 부드러운 젤리처럼 흔들렸다. 매 움직임마다 광선이 그 표면을 통과했다.
눈이 없었다.
준호는 그 사실에 놀랐다. 눈이 없는데도, 그림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피부로 보는 것처럼. 그 감각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정중한 시선이었다.
그림이 움직였다. 천천히. 마치 물 속에서 헤엄치듯이 공기 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것의 형태는 계속 변했다. 어떤 순간에는 공 같았고, 어떤 순간에는 물방울 같았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루미가 말했다. "그림은 소리로만 통한다. 말이 없다. 하지만 듣는다. 그리고 느낀다."
그림이 더 가까워졌다. 준호에서 1미터 정도까지. 그곳에서 멈췄다. 마치 무언가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준호는 숨을 쉬었다.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코를 통해. 의식적으로 천천히.
"안녕."
준호가 말했다.
그림이 떨렸다.
작은 떨림이었다. 마치 물 위에 한 방울이 떨어지고 그 물결이 퍼지듯이. 그 떨림이 그림의 몸 전체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준호 쪽으로 한 발 다가갔다.
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하지만 겁이 아니었다. 호기심이었다. 이 투명한 것이 뭔지,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를 알고 싶은 호기심.
"넌 뭐야?"
그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더 가까워졌다. 준호의 발목까지의 거리.
준호는 무릎을 천천히 구부렸다. 그림의 높이에 맞춰서. 이렇게 낮아지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밀어낸다. 루미가 있었다. 루미가 보고 있었다.
그림이 멈췄다. 준호의 얼굴과 같은 높이.
투명한 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준호는 봤다. 마치 작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그 몸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준호는 손을 뻗었다.
"만져도 돼?"
그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그림의 표면에 닿았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마치 젤리처럼. 하지만 완전히 젤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액체와 고체 사이의 어딘가였다. 손가락이 빠질 것 같으면서도, 빠지지 않았다.
그림이 준호의 손 위에 올라탔다.
아주 천천히. 마치 시간을 들여서 준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처럼. 준호의 손 위에 올라온 그림의 일부는 손의 온기를 흡수했다. 그 순간 그것의 색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준호는 손을 더 펼쳤다.
그림이 손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전체 몸무게를 손 위에 올렸다. 가볍기 짝이 없었다. 마치 물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물은 흐르지 않았다.
"루미."
준호가 말했다.
"그림이...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루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지 않았지만, 무거웠다.
"그림은 처음으로 주인을 만났다. 석화는 오래되었고, 나는... 이곳 자체다. 하지만 그림은 새로웠다. 그림은 주인을 알고 싶어한다."
준호는 그 말을 이해했다. 마치 자신의 언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 안에 직접 그려지는 것처럼.
그림이 움직였다. 손 위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준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그 경로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마치 거대한 탑을 오르는 것처럼 느리게.
준호는 그것을 허용했다.
그림이 준호의 어깨에 올라탔다. 목 근처에. 그곳에서 멈췄다. 마치 준호의 심장의 고동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인 것처럼.
"그림은 배운다."
루미가 말했다. "주인으로부터. 주인의 모든 것을."
그림이 떨렸다. 준호의 목 주변에서.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준호는 느꼈다. 그것은 설렘이었다.
준호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림을 어루만졌다. 아주 가볍게. 마치 물 위에 손가락을 그으면서 파문을 만드는 것처럼.
그림이 울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몸이 흔들리며 내는 울음이었다. 마치 침묵의 울음이었다.
"그림은 약하다."
루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지만 그림은 배운다. 그리고 배우면, 자신이 뭔지 알 것이다."
준호는 그 말에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어루만졌다. 계속해서. 투명한 몸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것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준호를 필요로 했던 것이.
그리고 준호가 누군가를 필요로 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