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계에 소환됐는데 던전을 통째로 물려받았습니다모니터의 불빛이 준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 11시 47분. 시계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마감이 마감이 마감이...'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리듬이 없었다. 멈췄다 다시 시작했다 멈췄다. 하루 종일 그 반복이었다. 회사 내에서 준호는 '야근 중독'이라는 별명을 얻은 지 오래였다. 사실 중독이 아니었다. 그냥... 나갈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뭔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느낌을 무시할 수 없었다. 32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청소용역 아주머니들도 이미 나간 지 한참이었다. 형광등 불빛만 냉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 문장... 이상한데?'
준호는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 문단을 다시 읽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다. 불릿 포인트를 고쳤다. 색상을 변경했다. 폰트 크기를 조정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디테일을 계속 손질했다.
시간이 흘렀다.
자정을 넘었다.
화면 위의 커서가 깜빡였다. 준호의 눈도 함께 깜빡였다. 무거워졌다. 어제도 2시간을 잤다. 그 전날도 3시간을 잤다. 몸이 외쳤다. 하지만 준호는 듣지 않았다.
'한 번 더... 한 번 더만...'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았다. 같은 부분을 두 번 지웠다. 같은 단어를 세 번 입력했다.
뭔가 이상했다.
팔이 무거웠다. 아니, 팔 전체가 아니라 어깨부터 목까지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각이 흔들렸다.
'뭐지?'
준호는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사무실이 조금 회전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돌고 있는 것처럼.
'피곤한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찬 느낌이 들었다. 손이 차가웠다. 언제부턴지 자신의 손이 차갑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더 심했다. 얼음처럼.
준호는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였는데 몸이 따라오지 않았다. 뇌에서 신호를 보냈는데 팔다리가 반응하지 않는 그런 느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혹은 자신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뭐... 뭐야...'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움직였다. 하지만 음성대는 반응하지 않았다. 공기가 통과했지만 진동하지 않았다.
시각이 더 흔들렸다. 이제는 회전이 아니라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깊은 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눈앞의 형광등은 점점 멀어졌다. 흐릿해졌다. 까만색이 주변부터 침범해 들어왔다.
'이건... 뭐지?'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 생각도 끝나기 전에 세상이 검어졌다.
의자에서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모니터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무작위 키들을 눌렀다. 알파벳과 숫자와 기호들이 화면에 흩어졌다. 아무도 보지 않을 문장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자들.
사무실은 여전히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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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다시 열렸을 때, 그곳은 사무실이 아니었다.
눈을 떴을 때 첫 번째로 들어온 것은 어둠이었다.
회색빛 어둠. 검은색이 아닌, 마치 먼지가 가득한 공기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 준호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망막이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
천장이 보였다.
아니, 천장이 아니라 암석. 거친 표면의 돌.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암석층들이 손가락 길이만큼 튀어나와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더 어두운 틈들. 동굴. 이건 분명 동굴이었다.
준호가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팔을 들어올렸는데 그것도 자신의 팔인지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인 무게감이었다. 서서히. 매우 천천히. 팔꿈치가 어떤 표면에 닿았다.
바닥이었다.
차갑고, 젖어 있었다.
준호는 손에 닿은 감촉에 정신을 곤두세웠다. 습기. 아주 오래된 습기. 돌 위에 스며든, 아마도 수십 년은 묵은 물기 같은 것.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미끈거리지는 않았다. 단지 차갑고 축축했을 뿐.
천천히. 매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어둠이었지만, 눈이 조금씩 적응했다. 동굴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천장은 대략 팔을 수직으로 쭉 뻗었을 때 손가락이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손바닥 너비로 계산하면 거의 3미터. 아니, 정확하지 않다. 어둠 속에서는 거리 감각이 무너진다. 실제로는 더 가깝거나 더 멀 수 있다.
벽은?
준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목이 뻣뻣했다. 마치 수술 후 깨어난 환자처럼.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항의했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그것이 더 이상했다. 이 정도로 어색한 자세라면 분명 통증이 있어야 했다.
벽은 동굴의 벽이었다. 암석.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어딘가에서 물이 흘러내렸던 흔적이 보였다. 검은 줄무늬들. 아주 오래된 흔적들.
준호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곳은 어디인가?
질문이 들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마음속으로만 울려 퍼지는 질문.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기억을 더듬었다. 보고서. 마감 기한이 내일이었다. 아니, 어제였나? 시간 감각이 흐릿했다. 화면의 파란 빛. 이메일들. 팀장의 메시지. "준호, 이거 내일 아침까지 완성시켜."
그리고 그 다음은?
피로감. 극심한 피로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리고 뭐지?
검은색이었다. 점차 짙어지는 검은색. 마치 누군가 천천히 조명을 끄듯이.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 다음?
기억이 없었다.
준호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번에는 팔의 도움을 받아. 손가락이 차갑고 젖은 바닥을 딛고 있었다. 일어선 후, 한 발을 내디뎠다.
발이 소리를 냈다. 부드럽고 축축한 바닥 위에서. 물이 아니었다. 흙. 이것은 흙이었다. 동굴 바닥의 흙. 오래되고, 수분을 머금은.
준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벽을 만져야 했다. 방향 감각을 되찾기 위해. 동굴의 크기를 이해하기 위해.
손가락이 차갑고 거친 돌을 스쳤다.
그 순간, 무언가가 움직였다.
준호의 손가락이 발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것을 스쳤다. 아주 빠르게. 천장 쪽으로. 박쥐일까? 아니면 다른 동물?
준호는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
심장이 빨라졌다. 처음으로 신체가 반응했다. 명확한 반응. 경각심. 위험 신호.
"누... 누가 있어?"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음성대가 작동했다. 하지만 목이 칠칠했다. 물을 마신 기억이 없었다. 얼마나 오래 여기에 있었던 건가?
목소리는 동굴 안에서 울렸다. 음향효과. 에코. 산책로나 지하철역에서 들어본 것 같은. 하지만 이것은 훨씬 더 깊었다.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돌을 던진 것처럼 울려 퍼졌다.
답이 없었다.
준호는 조용히 섰다. 호흡을 고르려 했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마비된 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벽을 따라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동굴에 갇힌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기본 생존 원칙.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한 손을 벽에 대고. 다른 한 손은 앞으로.
발을 내디디고. 그 다음 발을 내디디고.
한 걸음. 한 걸음.
동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더 적응하면서. 어둠이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위에서? 옆에서?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아주 희미한 회색 빛. 마치 새벽녘의 하늘처럼. 하지만 여기는 실내였다. 동굴 안이었다. 그럼 이 빛은?
준호는 계속 걸었다.
동굴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벽이 더 멀어졌다. 손가락이 벽을 잃었다. 준호는 손을 더 크게 움직였다. 다시 벽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찾았다.
벽은 예상과 다른 방향에 있었다. 준호가 걷고 있는 공간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동굴이 구부러져 있었다.
계속 걸었다.
그러다 멈췄다.
무언가가 있었다.
앞쪽에. 어둠 속에서. 준호의 눈이 감지한 것은 움직임이었다. 작은 움직임. 흰색 같은 색이었다. 아니, 투명한 색. 빛을 산란시키는 형태.
준호는 숨을 죽였다.
"뭐... 뭐야?"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러운 톤으로.
앞의 형태가 더 가까워졌다.
준호의 눈이 초점을 맞췄다.
그것은...
생명체였다. 하지만 준호가 본 어떤 생명체와도 달랐다. 투명한 젤리 같은 몸. 크기는 대략 손가락 길이 정도. 표면에서 빛이 굴절되고 있었다. 마치 물의 표면처럼. 그것이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흐릿하고 불분명한 방식으로.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생명체도 움직이지 않았다.
2초. 3초. 5초.
그것이 먼저 움직였다. 준호 쪽으로. 아주 천천히. 위협적이지 않은 속도로.
준호의 몸이 긴장했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 이곳은 동굴이었다. 모르는 공간. 도망치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것이 더 가까워졌다.
준호는 천천히 한 발 물러났다.
그것도 멈췄다.
다시 몇 초의 침묵. 그 생명체는 준호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준호도 그것을 관찰하고 있듯이.
그것이 울음을 냈다.
음파 같은 것. 시각적으로 감지되는 진동.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공기를 통해. 아니, 더 깊게. 뼈를 통해.
그리고 그것은 돌아섰다.
천천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준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섰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제 확실했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도 확실했다.
그리고 이곳은...
동굴이라는 사실도 확실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준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깊게.
동굴의 어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