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당의 아버지로 빙의했습니다지하철 역 7번 출구에서 만난 시우는 교복 차림이 어색했다.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는데, 그 작은 몸이 학교 제복을 입고 서 있으니 뭔가 시간이 잘못 흐른 것 같았다.
"아빠!"
시우가 손을 들었다. 평범한 손이었다. 아직은.
박준호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가늘었다. 따뜻했다. 검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학교는 어땠어?"
"음... 괜찮았어."
시우가 가방 끈을 만지작거렸다. 박준호는 그 손을 봤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어봤다. 다섯 개. 모두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자꾸 그 미래의 손가락이 떠올랐을까. 검은 연기를 날리던 그 손.
"뭐 있었어?"
"어? 아, 음..."
시우가 옆을 봤다. 박준호는 아들의 옆얼굴을 봤다. 눈동자를 봤다. 검은색이었다. 모든 아이의 눈동자가 검은색이었다. 그걸 자꾸 잊었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렸어."
"그래? 뭘 그렸는데?"
"산. 아, 그리고..."
시우가 가방을 열었다.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림 몇 장이 들어있었다. 첫 번째 그림은 산이었다. 산 위에 해가 떠있었다. 평범한 그림이었다. 아이답던 그림이었다.
그 다음 그림을 봤을 때 박준호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검은 선이 많았다. 붓의 압력이 강했다. 먹을 짜낸 것 같았다. 그림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뭔가 움직이는 것을 그린 것처럼, 선들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뭐야?"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박준호는 그걸 깨달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시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선생님이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라고 했어. 그래서..."
"이게 뭐라고 생각했어?"
"음... 모르겠어. 손이 자꾸..."
시우가 자기 손을 봤다. 그 작은 손이 떨고 있었다.
박준호는 숨을 들이마셨다. 길게. 깊게. 길을 걷고 있었고, 주변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냉정해야 했다.
"아, 그럼 잘 그린 거네."
거짓말이었다. 목소리가 떨렸을 거다. 하지만 박준호는 스케치북을 시우의 손에 다시 건넸다.
"다른 건 없어?"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했어."
시우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리고... 박준호는 그걸 들었다. 그 목소리 속의 두 개의 음역대. 한 번에 두 가지 톤이 섞여 있었다. 마치 두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아니. 듣는 것을 잘못했을 거다.
"그래. 선생님이 맞아. 잘 그렸어."
박준호는 시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뜻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들을 안심시키려고. 하지만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차를 탔다. 평상적인 퇴근 시간의 도로였다. 차들이 밀려 있었다. 신호등이 빨갛게 켜져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급식. 돈까스였어."
"맛있었어?"
"음... 그냥 그랬어."
시우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창에 닿아있었다. 그 손가락을 따라가다 보니 손등이 보였다. 하얀 손등. 그리고 그 위에...
박준호는 눈을 비비었다. 피곤한 거겠지. 시차 때문에 눈이 이상한 거겠지. 시우의 손등에 뭔가 보인 것 같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
"응?"
"이은미 엄마가 일요일에 뭔가 준대. 뭔지 알아?"
박준호의 발이 페달에서 미끄러졌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는데,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경적음이 울렸다.
"뭐라고 했어?"
"아, 그냥 말만 했어. 뭔지는 안 알려준대."
시우가 엄마 흉내를 내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도 두 개의 음역대가 섞여 있었다. 박준호는 그걸 들었고, 또 다시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 일요일이면 알겠지."
박준호는 차를 출발했다. 신호등이 다시 빨갛게 바뀔 때까지 몇 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전진했다.
시우가 가방에서 뭔가를 더 꺼냈다. 수학 문제지였다.
"아빠, 이 문제 풀어줄 수 있어?"
박준호는 신호등을 봤다. 빨강에서 노랑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중에 봐. 지금은 운전 중이야."
"아, 그래. 미안해."
시우가 문제지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때 박준호는 봤다. 아들의 손가락이 문제지 위에서 멈췄을 때, 그 손가락이 만지던 곳의 글씨가 마치 번져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글씨가. 물감처럼.
"시우."
"네?"
"손톱은... 괜찮아?"
시우가 자기 손톱을 봤다. 평범한 손톱이었다. 분홍색이었다. 아이 같은 손톱이었다.
"응. 괜찮은데?"
"그래. 그럼 괜찮아."
박준호는 핸들을 꽉 쥐었다. 신호등은 빨강이 되어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시우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숨소리 아래에, 박준호만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빠, 괜찮아?"
"응.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박준호는 신호등이 녹색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일요일까지 버텨야 했다. 이은미가 "줄 것"이 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시우를 막아야 했다.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서울의 회색 도로 위에서.
밤 10시 정각. 박준호는 시우의 침실 불을 껐다.
"자. 이제 자야 해."
"응."
시우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작은 몸이 침대 위에서 웅크렸다. 박준호는 문을 열어 놓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누우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내일의 날씨와 일정들이 떠 있었다. 일요일까지 이틀이 남았다.
시우가 자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숨소리. 아이의 숨소리.
박준호는 눈을 감았다.
정확히 13분 뒤였다.
"아빠."
시우의 목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박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빈 공간을 바라봤다. 일어나지 않았다.
"응. 뭐야."
"목말아."
박준호는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따랐다. 컵은 차갑게 식었다. 그는 시우의 침실로 들어갔다.
아이는 베개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눈은 반쯤 떠 있었다.
"여."
물을 건넸다. 시우가 벌컥벌컥 마셨다. 작은 목이 움직였다. 그 목을 보면서 박준호는 생각했다. 18세가 된 시우의 목은 얼마나 검게 변해 있을까.
"더 마실래?"
"아니."
시우가 다시 누웠다. 박준호는 컵을 들고 나왔다.
"자. 이제 정말 자."
"응."
침실 문을 다시 닫았다.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누웠다.
이번엔 18분이 지났다.
"아빠."
박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뭐야."
"내일 뭐 하면 좋을까?"
"자고 있을 때."
"아, 그래."
침묵.
박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는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너무 피곤했다. 이 일주일은 너무 길었다. 지하철역에서 시우를 만난 그날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10분 뒤였다.
"아빠! 아빠!"
박준호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시우가 침실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실루엣만 보였다. 어둠 속의 아이.
"뭐야, 갑자기?"
"꿈 꿨어."
박준호는 소파에 앉았다. 얼굴을 비볐다. 손가락으로 눈을 문질렀다.
"무슨 꿈?"
"검은... 뭔가."
박준호의 손이 멈췄다.
"검은 거?"
"응. 자꾸 커져. 내 손에서."
시우가 자신의 손을 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보였다. 아이의 손. 분홍색 손톱. 평범한 손.
"꿈이야. 꿈일 뿐이야."
박준호가 일어났다. 시우에게 다가가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였다.
"자. 침대로 가자."
"응."
시우를 침실로 데려갔다. 이불을 덮어줬다. 손을 잡은 채로 있었다.
"아빠가 여기 있어. 자. 다시 자."
"응."
시우의 눈이 감겼다. 박준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그 손에서 검은 것이 자라나가는 것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시우의 숨이 다시 깊어졌다.
박준호는 그제야 일어났다. 거실로 돌아갔다.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어둠 속의 천장.
일요일. 일요일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아빠."
"..."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아빠."
다시.
"아빠!"
아이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박준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한 번의 깊은 숨을 쉬었다. 피곤함이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눈꺼풀은 납처럼 무거웠다.
침실로 들어갔다.
"뭐야."
"목 또 말라."
박준호는 부엌으로 갔다. 물을 따랐다. 이번엔 미지근했다. 시우에게 건넸다. 아이가 마셨다.
"더?"
"아니."
침대에 누운 아이를 바라봤다. 눈이 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떠 있었다.
"자."
"응."
침실을 나왔다.
다시 소파에 누웠다.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47분.
박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 눈이 다시 떠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아마 5분도 안 걸릴 것 같았다.
시우의 침실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 아래에, 또 다른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박준호는 귀를 막지 않았다. 그것도 시우의 숨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겹쳐 있는 것일 뿐, 아직은 분리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아빠."
정확히 4분 23초.
박준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소파 위에서 한숨을 쉬었다. 피곤한 숨.
"뭐야."
목소리가 나갔다. 거친 목소리.
"밤인데 자야지."
"응. 알았어."
침묵.
박준호는 눈을 감은 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렸다. 시우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낼 때까지.
일요일. 일요일이 오면 모든 게 끝날 거다.
이은미가 "줄 것"을 줄 거고.
시우는 멈춰 있을 거고.
그 검은 것도 멈춰 있을 거고.
아이의 손에서 글씨가 번지지 않을 거고.
이중으로 들리는 숨소리도 하나가 될 거고.
박준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빠."
정확히 6분 52초.
박준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느릿느릿. 마치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침실로 갔다.
시우를 다시 안았다.
아이는 따뜻했다.
"자. 아빠가 함께 있을 테니까."
침실의 바닥에 누웠다. 시우의 침대 옆에.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응."
시우가 중얼거렸다.
박준호는 천장을 봤다. 아이의 침실 천장. 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초록 별들. 밤에 빛나는 별들.
그 별들을 바라보면서 박준호는 눈을 감었다.
이번엔 깨지 않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