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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소환됐는데 직업이 상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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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의 틈 도서관 3층 경영학 섹션. 오후 2시 47분. 김준호는 책더미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엔 '조직관리론_기말과제_최종본(3).docx'라는 파일이 떠 있었고, 손에 들린 펜은 벌써 5분째 같은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조직 내 권력의 흐름을 분석하시오." 과제 주제였다. 교수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너무 추상적이었다. 너무 뭔가 없었다. 김준호는 한숨을 쉬고 노트북을 닫았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렌즈가 닿은 피부가 뻐근했다. 보통 이 시점이면 스트레스였다. 마감이 6일 남았는데도. '어차피 제출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항상 그렇게 했다. 평범하게. 합리적으로. A학점은 어렵지만 B+쯤이면 충분했다. 충분하다는 게 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그냥 충분했다. 도서관은 조용했다. 화요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이 적었다. 여기저기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책장을 넘기거나, 그냥 자고 있거나. 김준호는 일어났다. 경영학 섹션을 한 바퀴 돌았다. 책등을 읽으며 걸었다. '전략경영', '재무분석', '마케팅 원론'... 유명한 책들이었다. 대학생이 한 두 권쯤은 들어봤을 만한 제목들. 그 와중에 한 권이 튀어나왔다. 색깔부터가 달랐다. 회색 표지에 금색 글씨로 뭔가 써 있었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서 가까이 가야 했다. 김준호는 책을 꺼냈다. '시스템의 논리'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자는... 알 수 없었다. 이름이 정말 희미했다. 아니면 벗겨진 걸 수도 있었다. 출판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오래된 책인 것 같은데, 도서관 시스템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냥 펼쳐봤다. 첫 장은 말도 안 되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당신이 보는 세계는 시스템이 설계한 것이다." 김준호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기계발서인가? 이런 책이 경영학 섹션에?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인간은 패턴을 본다. 패턴을 보므로 패턴을 따른다. 패턴을 따르므로 시스템은 움직인다. 시스템이 움직이므로 현실이 생성된다. 현실을 모르는 자가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이건 좀... 다른 얘기였다. 김준호는 책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경영학 과제는 일단 미뤘다. 이 책이 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목차를 봤다. 1장. 보이는 계층과 보이지 않는 계층 2장. 정보의 비대칭성과 권력의 탄생 3장. 피드백 루프가 만드는 현실 4장. 규칙 안에서 규칙을 만드는 자 5장. 시스템을 읽는 눈 '조직 내 권력의 흐름을 분석하시오.' 그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게 그런 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이 어떻게 흐르는지가 아니라, 권력이 왜 흐르는지. 누가 그걸 설계했는지. 김준호는 1장을 읽기 시작했다. 첫 단락에서부터 뭔가 걸렸다. "조직에서 '직급'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직급은 단순한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정보 접근의 수준을 결정하는 게이트다. 더 높은 직급일수록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한다.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하는 자가 더 올바른 판단을 한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그 믿음이 현실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역이다." 김준호는 손에 들린 펜으로 그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더 높은 직급의 자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만 본다. 이것을 선택적 정보 처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것을 권력이라고 부른다." 도서관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아니, 깜빡인 게 아니라 항상 그렇게 맥박치듯 빛나는 거였다. 김준호는 지금 처음 눈여겨봤을 뿐이었다. 그 다음 문단이 더 이상했다. "당신이 조직에 속해 있다면, 당신은 이미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부품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선택이 자유로워 보이지만, 당신이 볼 수 있는 정보의 범위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당신이 당신의 상사를 신뢰한다면, 당신의 상사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세계만이 현실이 된다." 잠깐. 김준호는 책에서 눈을 떼고 천장을 봤다. 자신의 삶을 생각해봤다. 경영학과 1학년. 아버지는 회사원이었다. 어머니도. 그들은 항상 상사의 말을 따랐다. 회사의 규칙을 따랐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당신 이 세상이 그런 거라고, 누구나 그렇다고 말했다. 김준호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은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불안했다. 아니, 불안이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명확한 감정이 아닌, 흐릿한 감정. 마치 누군가 당신의 등 뒤에 서 있는데, 당신은 그걸 모르는 것처럼. 김준호는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시스템의 노예가 될 자질이 있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종류의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자다." 뭐 하는 소리야. 김준호는 코웃음을 쳤다. 도서관이 조용해서 음성이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옆자리 학생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김준호는 책장을 다시 넘겼다. 그리고 멈췄다. 정확히는 책 페이지가 멈춘 게 아니라, 그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책의 중간쯤에, 마치 누군가 그 자리에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그 문장은 다른 문장들보다 더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마치 소리치는 것처럼. "만약 당신이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추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방금 깨어났기 때문이다." 김준호의 손이 떨렸다. 책을 내려놨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도서관은 여전히 조용했다. 창밖의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시계는 여전히 2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이 소리야. 합리적인 학생답게, 김준호는 웃음으로 이를 덮으려고 했다. 이런 건 자기계발서의 흔한 수법이었다. 독자에게 특별함을 느껴주고, 자극을 주고, 책을 계속 읽게 하는 트릭. 하지만... 그 손가락을 책으로 다시 내렸을 때, 그 다음 장을 펴려는 손은,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려는 손가락이 종이에 닿는 순간, 세상이 울렸다. 음향이 아니라 진동이었다. 뼈를 타고 흐르는 주파수. 김준호는 책을 떨어뜨렸다. 아니, 떨어뜨린 게 아니라 책이 그의 손을 벗어났다. 차이가 있었다. 도서관의 불빛이 흔들렸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천장의 LED 패널이 맥박처럼 수축했다 팽창했다. 주변의 책들이 선반에서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처럼. 종이 냄새와 곰팡내가 한 점으로 응축되었다. "뭐... 뭐야?" 김준호가 일어서려다 멈췄다. 그의 발 앞에서 바닥이 끓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바닥이 빛났다.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그 사이의 무언가. 망간빛. 마치 사진의 네거필름처럼 현실의 역상(逆像)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이 원을 이루기 시작했다. 기하학적 정밀함으로. 완벽한 원형이 바닥에 새겨졌다. 그 안에 선들이 뻗어나갔다. 육각형, 팔각형, 복잡한 곡선들. 마치 마더보드의 회로도처럼. 아니, 더 복잡했다. 그것은 선들이 아니라 문자였다. 김준호가 본 어떤 문자도 아닌. 각도가 이상했다. 3차원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굽어져 있었다. 그 원진(圓陣) 위에 서 있는 게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데 0.3초가 걸렸다. 도망치려고 발을 떼려다가, 그 순간 원진이 빛났다. 음파처럼. 펄스처럼. 심장의 박동처럼. 몸이 떨렸다. 뼈가 울었다. 내장기관들이 떨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고막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공포가 아니었다. 이건 신체적 침해였다. 누군가 그의 몸속에서 악기를 튕기고 있었다. "아..." 소리가 나왔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약한 목소리. 원진의 선들이 더 밝아졌다. 빛이 손가락처럼 자라났다. 그 손가락들이 그의 발목을 감싸기 시작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감각. 존재와 부재 사이의 무언가가 살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이게 진짜인가? 책이 떨어진 곳을 봤다. 여전히 바닥에 있었다. '시스템의 논리'. 그 책도 원진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그 책이 펼쳐진 페이지에는 글씨가 새롭게 나타나고 있었다. 손으로 쓴 것 같은 필체. 그런데 손가락 하나로는 불가능한 굵기와 압력. 마치 칼로 파고드는 것처럼 종이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글씨가 보였다. —환영합니다, 깨어난 자여. 김준호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무릎을 꿇었다. 아니,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중력이 갑자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의 몸이 원진의 중심으로 끌려갔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할퀴었다. 손톱이 까졌다. 흙이 없는 도서관 바닥인데 손톱 안에 뭔가 까만 게 들어찼다. 그건 흙이 아니라 빛이었다. 원진의 빛이 그의 손에 묻어났다. "누... 누구야!" 이번엔 소리가 났다. 목이 찢어질 듯한 음성. 그 순간 원진이 폭발했다. 빛이 아니라 진동. 김준호의 세상이 화면처럼 깨졌다. 도서관이 여러 겹으로 나뉘었다. 각각의 층이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천장은 빠르게 돌고, 바닥은 느리게 물결쳤다. 책장은 마치 숨을 쉬는 생물처럼 팽창했다가 수축했다. 중심이 흐려졌다. 그는 끌려가고 있었다. 원진의 중심으로. 아니, 원진 자체로. 그 기하학적 도형이 그의 온 몸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점으로 응축되는 감각.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도서관의 천장이었다. 그리고 그 천장을 관통하는 거대한 눈. 아니, 눈이 아니라 렌즈였다. 카메라 렌즈처럼 조리개가 조여들었다 풀렸다. 그 너머로는 별들이 보였다. 하지만 별이 아니라 숫자였다. 0과 1로만 이루어진 숫자들이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 목소리. 몸 전체로 듣는 목소리였다. 귀가 아니라 뼈를 통해 전달되는 진동. —당신은 깨어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게임이 시작됩니다. —축하합니다. 김준호의 의식이 깊은 우물로 떨어져갔다. 마지막 순간, 손가락이 바닥에 남겨진 자국이 보였다. 다섯 개의 손톱 자국. 그 안에 깔린 것은 원진의 빛이 아니라, 그의 자신감이었다. 그것도 이제 없었다. 원진은 조용히 닫혔다. 도서관은 다시 고요해졌다. 책만이 바닥에 남겨졌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는 새로운 글씨가 적혀 있었다. —1단계: 당신의 정체를 확인하시오.